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리뷰

노란집 (박완서) 열림원

by joyaroma 2024. 5. 9.

 

고흐의 작품에도 <노란집>이 있는데,

박완서 작가님이 마지막 글쓰며 머물렀던 노란집.

자연의 경이에 감탄하고 감사하며 소박하게 인생을 마무리한 곳.

나이가 들면 완고해질수 밖에 없지만(누구나) 그 완고함에 철학이 담겨있고, 인생이 담겨 있다면,

그리고 다른 이에게 눈살 찌푸리거나 피해 주는 완고함이 아니라면,

그 사람의 분명한 색깔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쁜 것 같지 않다.

 

오래전 읽은 책인데,

책 속에 나오는 많은 단어들, 어휘들에 새삼 감탄한다.

그리고 잘 모르는 단어들이 많음에, 나의 무지를 자각하게 되며,

더 많이, 부지런히 읽어야겠다는 생각, 읽어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.

 

<내가 뽑은 밑줄 긋기>

 

그러나 그런 신기한 것들은 길들여지지마자 시들해지고 마는데 이 쑥잎이나 냉이 같은 보잘것 없는 것들은 어찌하여 해마다 새롭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인가.

그뿐인가.

새로운 문물에는 내가 더 살면 무슨 꼴을 더 보려나 싶게 역겨운 것도 많건간, 살갑고 포근한 봄볕 속에서 따위를 기는 기쁨은 이 좋은 것들을 앞으로 몇 해나 더 누릴 수 있을까. 마냥 아쉽고 애틋하니 이 무슨 조화인가.

사람은 속절없이 늙어가는데 계절은 무엇하러 억만년을 늙을 줄 모르고 해마다 사람 마음을 달뜨게 하는가

.-P 49 (봄볕 등에 지고)-

 

혼자 걷는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.

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칠십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.

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.

그러나 산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이런 복을 어찌 누릴까.

눈 온 산이 아니더라도 산에는 평지와 다른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.

그래서 오늘도 이 노구를 받아주소서.

산에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도 울렁거림과 함께 차분한 경건을 맛볼 수 있는 기회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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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산책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.

그 길은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.

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누군가가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 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.

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.

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.   

-P 71-72 (친절한 사람과의 소통)-

 

창호지 문밖 유리문을 통해 저만치 길모퉁이를 밝히는 가로등이 보였다.

가로등 불빛 속을 눈발이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.

아아, 바로 저 소리였구나.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한 시인도 있었지만 내 귀는 그렇게 밝지 못하다.

나를 깨운 건 소리가 아니라 느낌이었다.

고요, 평화, 부드러움의 감촉이었다.

나는 다시 자리에 들어 황홀하고 감미로운 수면 속으로 서서히 침몰했다.

-P126 (소리)-

 

내가 요새 마음 붙이고 사는 것들이 이렇게 하찮고 속절없는 것들이다.

그러나 내가 이런 사치를 누려도 되는 것일까, 문득 겁이 날 정도로 그런 것들은 다 나에게 넘치는 것들이다.

나이 든 사람들은 건강하라든가, 젊어 보인다는 걸 가장 큰 덕담으로 치지만 나이보다 젋지도 늙지도 말고 나이만큼 살아가는 게 가장 큰 건강이라는 것도 그 보잘것 없는 것들한테 배운 지혜다.

-P169 (하찮은 것에서 배우기)-

 

나이 들수록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어렵고 발목이나 무릎에도 부담이 더 간다.

가끔 나보다 젊은 사람들하고 산에 갈 적이 있는데 그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오르막길에 기운을 다 써버리면 내려올 때 다리가 휘청거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.

제 힘으로 당당하게 걸어 내려오려면 올라갈때 힘을 다 써버리지 말고 남겨놓아야 한다.

등산에 있어서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,인기에 있어서도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 품위 있기가 더 어렵다는 걸 전직 권력자들의 언행을 보면서 곰곰이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.

-P 173 (내리막길의 어려움)

 

우리는 천성적으로 겨울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고 봄은 조바심한다고 오는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.

그거야 말로 얼마나 믿음직한 우리의 저력인가.  

-P 199 (우리의 저력)-

 

나는 감각이 굳어지거나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으려고,

그러니까 노화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작가라고 감히 자부한다.

앞으로 노인들 얘기를 더 많이 쓰게 될 지 아닐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.

확실한 건 나는 내가 겪고 깊이 느낀 것 밖에는 잘 쓰지 못한다.

-P 212 (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쓴다)-

 

돌이켜보면 유년의 시간이 칠십 평생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건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 때문이 아니었을까.

-P 215 (심심하면 안되나)-

 

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.

이 나이까지 견디어온 그런 고비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.

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,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,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.

-P 272 (황홀한 만남)-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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